경마장은 말과 기수가 일정한 거리를 달려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로, 단순한 경기장을 넘어 인간의 욕망, 경쟁,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담은 독특한 공간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마는 고대 로마의 전차 경주에서 현대의 글로벌 스포츠로 이어졌으며,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의 말타기 놀이에서 일제강점기의 강제적 도입, 현대의 레저 문화까지 이어져 왔다. 특히 한국 경마장은 도박과 오락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회적 논란과 열정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1. 기원: 고대 전차 경주와 경마의 시작
경마의 역사는 고대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문명에서 말과 전차를 이용한 경주가 기록되었고, 기원전 776년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전차 경주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라는 거대한 경마장에서 수십만 관중이 말과 전차의 질주를 관람했다. 이 시기 경마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황제의 권력 과시와 민중의 오락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사들의 말타기 대회가 경마의 전신으로 발전했고, 12세기 영국에서 “킹스 플레이트”라는 경주가 시작되며 현대 경마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말 품종 개량과 도박의 결합으로 경마장은 상류층의 사교장으로 변모했다. 이런 글로벌 흐름은 훗날 한국 경마장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하인드 하나: 로마의 금지된 내기
기원전 2세기 로마 경마장에서 한 관중이 황제의 말에 반대하며 거액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황제의 말이 질 것”이라며 내기를 걸었고, 놀랍게도 승리했다. 그러나 황제의 분노로 그는 처형되었고, 이 사건은 경마가 권력과 욕망의 위험한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이 비밀스러운 내기는 경마장의 초기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2. 조선 시대: 한국 경마의 전신과 말타기 놀이
한국에서 경마의 뿌리는 조선 시대(1392~1897)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 훈련으로 “말타기”와 “마상재”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대에는 “별시무과”라는 무과 시험에서 기마술이 평가되었고, 이는 말과 인간의 경쟁적 요소를 담았다. 민간에서는 농민들이 명절에 말을 달리게 하며 “말달리기 놀이”를 즐겼다. 이 놀이는 경마의 초기 형태로, 도박보다는 공동체 축제의 성격이 강했다.
조선 후기에는 제주도에서 “제주마”가 사육되며 말의 품종 관리와 경주가 시작되었다. 제주마는 작지만 튼튼한 특징으로 유명했고, 이는 훗날 한국 경마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경마는 체계적 경마장이 아니라 들판과 마을에서 이루어진 소박한 행사였다.
비하인드 둘: 금지된 말달리기
조선 중기, 한 마을에서 말달리기 놀이가 금지된 사건이 있다. 지역 관리가 “민중이 너무 흥청거린다”며 이를 막았지만, 농민들은 밤에 몰래 말을 달리며 저항했다. 한 농민은 “말이 달리면 마음도 뛴다”고 말하며 처벌을 감수했고, 이 사건은 경마가 억압 속에서도 민중의 열정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3. 일제강점기: 경마장의 강제 도입과 저항
한국에 현대적 경마장이 도입된 것은 일제강점기(1910~1945)다. 일본은 1910년대 조선에 “경마”를 들여왔다. 1922년 5월 20일, 서울 용산에 “조선경마구락부”가 설립되며 최초의 경마장이 개장했다. 이는 일본의 경마 문화(에도 시대부터 발전)를 이식한 것으로, 일본 상류층과 조선 내 친일파를 위한 사교장이었다. 경마장은 도박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인의 돈을 착취했다.
1933년에는 과천에 “경성경마장”이 문을 열었고, 이는 현대 렛츠런파크 서울의 전신이다. 당시 경마는 서러브레드(영국 품종)로 진행되었고, 조선인은 관객으로 참여했지만 경주 운영은 일본이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 상인들은 경마장을 “일본의 놀이터”로 비판하며 저항했고, 일부는 몰래 내기를 걸며 생계를 유지했다.
비하인드 셋: 경마장의 비밀 저항
1935년, 경성경마장에서 한 조선인이 일본 기수의 말에 반대하며 거액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조선의 자존심”을 걸었다고 외쳤고, 놀랍게도 승리했다. 일본 경찰은 이를 “불온 행위”로 간주해 그를 체포했지만, 관중들은 환호하며 돈을 나눴다. 이 비밀 내기는 경마장이 억압 속에서도 저항의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4. 해방과 한국전쟁: 혼란 속 경마의 생존
1945년 해방 이후 경마장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인이 떠나며 경마 운영이 중단되었지만, 조선인들은 이를 되살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경마회”가 설립되었고, 용산 경마장이 재개장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점령되며 경마장은 파괴되었다.
전쟁 중에도 경마는 살아남았다. 부산 피난지에서 미군과 조선인들이 “임시 경마장”을 만들어 말을 달렸고, 이는 생존을 위한 오락이었다. 1953년 휴전 이후, 1954년 한국마사회(당시 조선경마회)가 설립되며 경마는 재건되었다. 과천 경마장이 복구되었고, 제주 경마장은 제주마 보호를 목적으로 1960년대 개장했다.
비하인드 넷: 부산의 비밀 경마
1951년 부산에서 한 상인이 미군과 비밀 경마를 벌인 사건이 있다. 그는 “말이 달리면 전쟁도 잊는다”며 폐허 속에서 경주를 열었고, 미군은 통조림을 걸었다. 경찰이 이를 단속했지만, 상인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라며 벌금을 냈다. 이事件은 경마가 혼란 속에서도 희망의 도구였음을 보여준다.
5. 1960~80년대: 경제 성장과 경마의 황금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은 경마를 크게 변화시켰다. 1962년 경마법이 제정되며 합법적 도박으로 인정받았고, 과천 경마장은 현대적 시설로 재건되었다. 1970년대에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이 경마장을 찾으며 황금기를 맞았다. “서울경마장”은 서러브레드로, 제주는 제주마와 한라마로 경주를 진행하며 지역성을 살렸다.
1980년대에는 “경마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미지를 개선했다. 이는 도박의 부정적 인식을 줄이고 가족 단위 관광지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1989년 부산경남경마공원이 개장하며 경마는 전국화되었다.
비하인드 다섯: 경마장의 비밀 사기
1978년, 과천 경마장에서 한 사기꾼이 “확실한 승리”를 약속하며 돈을 모은 사건이 있다. 그는 “기수를 매수했다”고 거짓말했지만, 경주가 끝난 후 잠적했다. 관객들은 분노했지만, 경찰은 “도박의 위험”이라며 수사를 중단했다. 이 사건은 경마의 황금기 뒤에 숨은 어두운 욕망을 보여준다.
6. 1990~2000년대: 상업화와 논란의 시대
1990년대 경제 호황은 경마를 상업화로 이끌었다. 1998년 “렛츠런파크”라는 브랜드가 도입되었고, 인터넷 경마가 시작되었다. 2005년에는 연간 매출 7조 원을 돌파하며 경마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상업화는 도박 중독과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 2000년대 “경마 폐지론”이 대두되었고, 시민단체는 “가정 파괴의 주범”이라며 반발했다.
2009년 제주경마공원이 현대화되며 제주마 보호와 관광을 결합한 모델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도박 이미지는 여전했고, 정부는 규제를 강화했다.
비하인드 여섯: 렛츠런의 비밀 갈등
1998년 “렛츠런파크” 명칭 도입 당시, 한국마사회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다. 일부 직원은 “도박 이미지를 숨기려는 속임수”라며 반발했지만, 경영진은 “가족 공원”을 강조하며 밀어붙였다. 이 비밀 갈등은 경마장이 상업화와 이미지 개선 사이에서 흔들렸음을 보여준다.
7. 2020년대와 현재: 디지털과 미래의 갈림길
2025년 3월 현재, 한국 경마장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새롭게 변모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2020~2022)으로 관중이 줄자, 2021년 “온라인 경마”가 본격화되었다. 렛츠런파크 서울, 부산경남, 제주는 연간 300만 명이 방문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2023년에는 AI로 경주 결과를 예측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며 혁신을 꾀했다.
기후 변화로 말 사육 비용이 늘고, 도박 규제가 강화되며 경마장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24년 한국마사회는 “친환경 경마”를 선언하며 전기차와 재생 에너지를 활용한 운영을 시작했다. 제주경마공원은 제주마 보존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비하인드 일곱: 팬데믹 속 비밀 경마
2020년,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비밀 경마가 열렸다는 소문이 있다. 한 직원이 “관객 없이도 말을 달리게 하자”며 몰래 경주를 진행했지만, 방역 당국에 발각되었다. 그는 “경마의 불을 꺼뜨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경마가 위기 속에서도 생존 의지를 보여준다.
결론
경마장의 역사는 고대 로마의 전차 경주에서 시작해 조선의 말타기, 일제의 강제 도입, 현대의 디지털 경마로 이어졌다. 금지된 내기, 말달리기의 저항, 경성의 반란, 피난지의 희망, 사기와 갈등, 팬데믹의 생존 같은 비하인드는 경마장이 단순한 경기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2025년 오늘, 경마장은 말과 인간의 질주를 넘어 시대의 욕망과 미래를 담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다음에 경마장을 찾을 때, 그 질주 뒤에 숨은 이야기를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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