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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전통시장

알구 보면

by ALGOO_M 2025. 2. 2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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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은 서울 종로구 예지동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 시장으로,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빈대떡, 마약김밥, 육회 등으로 유명한 이곳은 단순한 재래시장을 넘어 한국의 전통과 근대사의 격동을 담은 살아있는 유산이다. 조선 후기 배오개 시장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의 상인 투쟁, 현대의 한류 먹거리 명소로의 변신까지, 광장시장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민중의 삶과 숨결을 간직해왔다. 그 뒤에는 정치적 갈등, 생존을 위한 저항, 그리고 인간의 드라마가 얽혀 있다.

1. 기원: 조선 후기 배오개와 시장의 태동
광장시장의 뿌리는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배오개(이현梨峴) 시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오개는 종로4가와 예지동 일대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로, “배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을 지녔다. 『동국문헌비고』에는 배오개가 포목, 그릇, 농산물을 거래하는 번성한 장터로 묘사되며, 이는 광장시장의 초기 모습을 엿보게 한다. 조선 후기 경제가 성장하며 상인 계층이 형성되었고, 배오개는 한양의 물류와 교역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당시 시장은 주로 노점과 임시 천막으로 운영되었고, 계절에 따라 물건이 달라졌다. 봄에는 채소와 씨앗, 가을에는 곡식과 포목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배오개는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열악한 환경 탓에 상인들은 상설 시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는 광장시장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었다.

비하인드 하나: 금지된 상인의 꿈
18세기 말, 배오개에서 한 상인이 상설 시장 건립을 제안한 사건이 있다. 그는 “비를 피하고 장사를 늘리자”며 동료들을 설득했지만, 지방 관리는 이를 “불법 집회”로 간주해 금지했다. 상인은 몰래 자금을 모아 계획을 추진했지만, 관아의 단속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상인들 사이에 “우리만의 시장”이라는 열망을 심었고, 광장시장의 씨앗이 되었다.

2. 1905년: 광장주식회사의 설립과 근대 시장의 시작
광장시장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1905년이다. 1905년 7월, 조선 상인들은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을사늑약(1905년 11월) 직전, 일본이 화폐정리사업을 단행하며 조선 상인들의 기반을 흔든 데 대한 반발이었다. 김종한, 박승직(훗날 두산그룹 창업자) 등 34명의 발기인이 토지와 현금 10만 원을 출자하며 시장 건립을 추진했다.
“광장”이라는 이름은 청계천의 광교(廣橋)와 장교(長橋) 사이를 복개해 시장을 세우려던 계획에서 유래했다. 한자 “廣藏”은 “너르고 긴 창고”를 뜻하며, 상인들의 원대한 포부를 담았다. 그러나 당시 토목 기술로는 청계천 복개가 불가능했고, 배오개로 터를 옮겨 시장이 개설되었다. 1905년 개장 당시 “동대문시장”으로 불렸지만, 1960년대부터 “광장시장”으로 명칭이 굳어졌다.

비하인드 둘: 박승직의 비밀 투자
광장주식회사 설립 당시, 포목상으로 큰돈을 번 박승직은 비밀리에 자금을 댔다. 그는 일본 상인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조선 상인만의 시장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자신의 재산 일부를 몰래 출자했다. 그러나 일본 관리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겪었고, 그는 “가족을 위한 투자”라며 둘러댔다. 이 비밀스러운 후원은 광장시장이 조선인의 자존심으로 태어난 배경을 보여준다.

3. 일제강점기: 상인들의 저항과 시장의 성장
일제강점기(1910~1945)는 광장시장이 조선 상인들의 생존과 저항의 무대가 된 시기다. 일본은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장악하며 조선 상인을 억압했지만, 광장시장은 조선인 중심의 독립적 시장으로 유지되었다. 1910년대 포목과 생활용품이 주를 이뤘고, 1920년대에는 먹거리 골목이 형성되었다.
1925년 광장시장 상인들은 일본의 경제 착취에 맞서 “배오개 파업”을 벌였다. 일본 상인들이 저가 상품으로 시장을 점령하자, 조선 상인들은 단체로 영업을 중단하며 저항했다. 이 사건은 일본 총독부의 주목을 받았지만, 상인들의 단결로 시장은 살아남았다.

비하인드 셋: 빈대떡의 비밀 기원
1930년대, 광장시장에서 빈대떡을 처음 판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황해도 피난민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쇼트닝(식용유)을 사다가 녹두를 부쳐 팔았다. 일본 경찰이 “불법 장사”로 단속하려 했지만, 상인들이 그녀를 숨겨줬다. 이 빈대떡은 “막부치”로 불리며 광장시장의 명물이 되었고, 생존을 위한 저항의 맛으로 전해진다.

 
4. 해방과 한국전쟁: 혼란 속 광장시장의 재건
1945년 해방 이후 광장시장은 새 국면을 맞았다. 일본 상인들이 떠나며 시장은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왔고, 포목과 먹거리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점령되며 시장은 큰 타격을 받았다. 포장마차와 노점이 파괴되었고, 상인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 중에도 광장시장은 살아남았다. 부산 피난지에서 상인들은 빈대떡과 국수를 팔며 생계를 이어갔고,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돌아와 시장을 재건했다. 1950년대 “닭한마리 골목”이 생기며 먹거리 시장으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비하인드 넷: 피난지의 비밀 장사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한 상인이 미군에게 빈대떡을 판 사건이 있다. 그는 “미군 통조림”을 대가로 받았고, 이를 시장에 나눴다. 일본 경찰 대신 미군과의 거래는 광장시장이 생존을 위해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피난 빈대떡”으로 전해지며 전쟁 속 희망을 상징한다.

5. 1960~80년대: 경제 성장과 먹거리 시장의 황금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은 광장시장을 크게 변화시켰다. 산업화로 도시 인구가 늘며 시장 수요가 폭발했고, 1970년대 아케이드 시설이 도입되었다. 포목과 생활용품은 줄었지만, 먹거리 골목은 황금기를 맞았다. 빈대떡, 육회, 마약김밥, 닭한마리가 명물로 자리 잡았고, 연간 방문객은 수십만 명에 달했다.
1980년대에는 광장시장이 서민의 사랑방으로 번성했다. “닭한마리”는 값싼 단백질원으로 노동자들에게 인기였고, 빈대떡은 비 오는 날 더 붐볐다. 이 시기 시장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비하인드 다섯: 마약김밥의 비밀 기원
1980년대, 한 포장마차 주인이 김밥에 참기름과 매운 소스를 더한 “마약김밥”을 만들었다. 그는 “먹으면 중독된다”고 농담했지만, 손님들이 줄을 서며 명물이 되었다. 일본 식당의 영향을 받은 이 레시피는 비밀리에 전수되었고, 광장시장의 창의성을 보여준다.

6. 1990~2000년대: 상업화와 한류의 시작
1990년대 경제 호황은 광장시장을 상업화로 이끌었다. 1995년 종로5가역과 연결되며 접근성이 좋아졌고, 외국인 관광객이 늘었다. 2000년대 한류 붐으로 광장시장은 “K-푸드”의 성지로 떠올랐다. 2009년 미국 영화감독 팀 버튼이 빈대떡을 먹는 모습이 포착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 시장은 먹거리 특화 거리로 변모했다. 마약김밥, 육회, 수수부꾸미 등 300여 종의 메뉴가 손님을 맞았고,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그러나 상업화로 전통 상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비하인드 여섯: 팀 버튼의 비밀 방문
2009년 팀 버튼은 비밀리에 광장시장을 찾았다. 그는 “가위손” 촬영 후 한국을 방문하며 빈대떡을 맛봤고, 스태프에게 “이 맛은 영화 같다”고 말했다. 이 방문은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인들의 입소문으로 퍼지며 광장시장의 세계적 명성을 키웠다.

7. 2020년대와 현재: 한류와 미래의 갈림길
2025년 3월 현재, 광장시장은 120주년을 맞아 한류 먹거리 명소로 우뚝 섰다. 코로나19 팬데믹(2020~2022)으로 방문객이 줄었지만, 2021년 “랜선 광장시장 투어”가 화제가 되며 회복했다. 2023년에는 연간 500만 명이 방문하며, “K-푸드 스트리트”가 글로벌 관광지로 인정받았다.
기후 변화와 물가 상승으로 전통 먹거리의 재료 공급이 불안정해졌지만, 상인들은 “유기농 빈대떡” 같은 혁신으로 대응하고 있다. 2024년 서울시는 광장시장을 “전통문화 유산”으로 지정하며 보존에 나섰다.

비하인드 일곱: 팬데믹 속 비밀 장사
2020년, 한 상인이 팬데믹 속 비밀리에 빈대떡을 배달했다. 그는 “시장의 불을 꺼뜨릴 수 없다”며 몰래 주문을 받았지만, 방역 당국에 발각되었다. 상인들은 벌금을 내고도 “광장시장은 살아있다”고 외쳤고, 이 사건은 생존 의지를 보여준다.

결론
광장시장의 역사는 조선 후기 배오개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의 투쟁, 현대의 한류 명소로 이어졌다. 금지된 상인의 꿈, 박승직의 투자, 빈대떡의 기원, 팀 버튼의 방문, 팬데믹의 저항 같은 비하인드는 광장시장이 단순한 시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2025년 오늘, 광장시장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심장으로, 과거의 숨결을 미래로 잇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다음에 빈대떡을 먹을 때,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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