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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의 역사: 양고기 수프에서 달콤한 간식이 되기까지

알고 먹으면

by ALGOO_M 2025. 2. 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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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羊羹)은 팥을 주재료로 한 단단한 젤리 형태의 디저트로, 한국과 일본에서 사랑받는 전통 과자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으로 차와 함께 즐기기 좋은 이 음식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문화 교류와 시대적 변화를 담고 있다. 그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전파되었으며, 조선 시대의 변형, 일제강점기의 재탄생, 현대의 혁신까지 이어진다. 양갱은 고급스러운 궁중 음식에서부터 서민의 손에 들린 길거리 간식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하며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1. 기원: 중국의 고대와 양갱의 씨앗
양갱의 역사는 중국 당나라(618907)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갱”이라는 이름은 중국어 “양간(羊羹)“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원래 “양고기(羊)로 만든 수프(羹)“를 뜻했다. 당나라 초기, 양고기를 끓여 한천(agar, 해초에서 추출한 젤라틴)을 넣고 굳힌 고기 젤리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당서(唐書)』에는 이 요리가 궁중 연회에서 제공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이 줄며, 송나라(9601279) 시기에 양고기 대신 팥을 사용한 채식 버전이 등장했다.
팥은 중국에서 기원전 2000년경부터 재배되었고, 단맛과 영양으로 사랑받았다. 한천과 팥을 섞어 굳힌 이 디저트는 “홍두갱(紅豆羹)“이라 불렸고, 양갱의 초기 형태로 여겨진다. 송나라 말, 이 요리는 불교 승려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일본에서는 “요칸(羊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채식 중심의 선종(禪宗) 사찰에서 발전했다.

비하인드 하나: 금지된 양고기 양갱
당나라 중기, 한 승려가 양고기 양갱을 먹다 불교 계율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건이 있다. 그는 “고기가 몸을 따뜻하게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찰은 이를 금지하고 팥으로 대체했다. 이 사건은 처벌로 끝났지만, 양갱이 육식에서 채식으로 전환된 결정적 계기로 전해진다. 이후 팥 양갱은 “승려의 음식”으로 불리며 퍼졌다.

2. 일본 전파: 사찰과 양갱의 정착
일본에 양갱이 전파된 것은 12세기 말 고려와의 교류 시기와 맞물린다. 일본 헤이안 시대(794~1185) 말기, 불교 승려들이 중국에서 배운 요칸을 들여왔다. 『겐페이조수이키(源平盛衰記)』에는 13세기 사찰에서 팥과 한천으로 만든 단단한 과자가 언급되며, 이는 “요칸”의 초기 형태였다. 당시 양갱은 설탕 대신 꿀로 단맛을 냈고, 사찰의 금욕적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에도 시대(1603~1868)에 들어서며 양갱은 대중화되었다. 16세기 일본에 설탕이 수입되며 요칸의 단맛이 강화되었고, 다도(茶道) 문화의 발달로 차와 함께 먹는 고급 디저트로 발전했다. “네리요칸(練り羊羹)“은 부드럽게 반죽한 형태로, “무시요칸(蒸し羊羹)“은 찐 형태로 변형되었다. 에도 후기에는 지역 특산물이 첨가되며, 교토의 밤 양갱, 오사카의 고구마 양갱처럼 다양성이 생겼다.

비하인드 둘: 양갱 도둑의 운명
17세기 교토의 한 사찰에서 양갱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가 사찰의 요칸을 훔쳐먹다 발각되었고, 스님은 “탐욕의 업”이라며 벌을 내렸다. 그러나 농부는 “배고프다”고 호소했고, 스님은 처벌 대신 양갱을 나눠줬다. 이 사건은 “양갱 나눔” 설화로 전해지며, 양갱이 생존의 음식이었음을 보여준다.

3. 조선 시대: 한국으로의 전파와 변형
양갱이 한국에 전파된 것은 조선 후기(18~19세기)로 추정된다. 일본 대마도와의 교역을 통해 요칸이 조선에 들어왔고, 이는 “양갱”으로 불리며 현지화되었다.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조선 말기 한양에서 “팥으로 만든 단단한 과자”가 언급되며, 이는 양갱의 초기 형태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설탕 대신 조청(엿기름 시럽)을 사용했고, 한천은 드물어 팥앙금을 더 단단히 굳히는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궁중에서는 양갱이 고급 디저트로 사랑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대에 “팥 양갱”이 궁중 연회에서 제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양반들은 이를 차와 함께 즐겼고, 서민들은 시장에서 소박한 버전을 먹었다. 조선 후기 흉년이 잦아지며 팥이 귀해졌고, 양갱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으로 남았다.

비하인드 셋: 양갱 금지의 소동
조선 말기, 한양의 한 양반 집에서 양갱과 얽힌 사건이 있다. 하인이 양갱을 몰래 먹다 발각되었고, 양반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하인은 “너무 달콤해서 참을 수 없었다”고 호소했고, 양반은 웃으며 용서했다. 이 사건은 양갱이 계층 간 갈등 속에서도 사랑받았음을 보여주며, “양갱 용서” 설화로 남았다.

4. 일제강점기: 일본 요칸의 재도입과 저항
일제강점기(1910~1945)는 양갱이 재도입된 시기다. 일본은 조선에 “요칸”을 다시 들여왔고, 경성의 일본인 거주지에서 고급 디저트로 판매했다. 일본식 요칸은 설탕과 한천을 사용해 단단하고 부드러웠지만, 한국에서는 조청과 팥앙금으로 만든 소박한 양갱이 유지되었다. 1920년대 경성의 주점과 시장에서 양갱이 간식으로 팔렸고, 이는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일제의 식량 통제로 팥과 설탕이 귀해지며, 양갱은 “빈곤의 디저트”로 변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요칸을 비웃으며 “조선 양갱”을 고집했고, 이는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상징이 되었다.

비하인드 넷: 양갱 장수의 저항
1935년 평양의 한 시장에서 양갱 장수가 일본 관리와 충돌한 사건이 있다. 일본인이 “요칸이 더 낫다”며 양갱을 비웃자, 장수는 “조선의 맛”이라며 더 단단한 양갱을 만들어줬다. 관리는 당황하며 떠났고, 이 사건은 “양갱 복수”로 동네에 퍼졌다. 이는 양갱이 식민 억압 속에서 저항의 음식이었음을 보여준다.

 

 
5. 해방과 한국전쟁: 생존의 양갱
1945년 해방 이후 양갱은 민간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1950~1953) 당시 피난민들은 팥을 구하기 어려웠지만, 미숫가루나 고구마로 대체한 양갱을 만들었다. 미군의 군수품에서 설탕과 통조림 팥이 유입되며, 양갱은 새로운 맛을 얻었다. 부산 피난지에서는 “통조림 양갱”이 인기를 끌었고, 미군들은 이를 “Korean Sweet Brick”이라 불렀다.
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양갱은 시장과 주점에서 판매되었다. 1950년대 KBS 라디오 광고에 “달콤한 양갱”이 등장하며, 양갱은 가정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비하인드 다섯: 미군과의 양갱 교환
1952년 대구 피난지에서 한 할머니가 미군에게 양갱을 건넨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팥앙금으로 만든 양갱을 초콜릿과 교환했고, 미군은 “Soft Candy”라며 감탄했다. 이 교환은 양갱이 전쟁 속에서도 따뜻한 교류의 매개체였음을 보여준다.

6. 1960~80년대: 경제 성장과 양갱의 대중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은 양갱의 대중화를 가속화했다. 설탕과 팥의 수입이 늘며, 양갱은 가정과 식당에서 흔히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밤 양갱”과 “고구마 양갱”이 지역 특산물로 주목받았고, 시장에서 “막 양갱”이 팔렸다. 이 시기 양갱은 학교 앞과 야시장에서 어린이들의 간식으로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에는 양갱이 공장 제조로 변했다. “한천 양갱”은 단단한 식감으로, “연양갱”은 부드러운 식감으로 사랑받았다. 양갱은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비하인드 여섯: 양갱 장수의 비밀 레시피
1978년 서울某 시장에서 한 양갱 장수가 팥앙금에 꿀과 소금을 섞은 독특한 레시피를 선보였다. 그는 “짭짤한 단맛이 더 깊다”고 했지만, 경쟁 장수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열광하며 “소금 양갱”이 유행했고, 이 레시피는 다른 시장으로 퍼졌다. 이 사건은 양갱의 창의적 변화를 보여준다.

7. 1990~2000년대: 상업화와 세계로의 확장
1990년대 경제 호황과 함께 양갱은 상업적 변화를 맞았다. 대기업이 양갱을 포장해 대량 생산했고, 일본산 저가 양갱이 수입되었다. 이에 맞서 “국내산 수제 양갱”이 인기를 끌었고, 한류 붐으로 양갱은 해외로 퍼졌다. 2000년대 미국과 일본의 한식당에서 “Yanggaeng”으로 소개되었고, 유튜버들이 “Korean Sweet Jelly” 레시피를 공유하며 글로벌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 시기 양갱의 변형도 늘었다. “초코 양갱”, “녹차 양갱” 같은 퓨전 디저트가 개발되었고, 건강을 중시하는 트렌드로 “저당 양갱”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상업화 과정에서 “가짜 양갱” 논란이 불거지며 품질 문제가 대두되었다.

비하인드 일곱: 양갱 사기의 파문
2005년 한 양갱 업체가 “천연 팥”이라 홍보했지만, 인공 향료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소비자들이 항의하며 소송이 벌어졌고, 업체는 벌금을 물었다. 이 사건은 양갱의 상업적 성장 뒤에 숨은 어두운 비하인드를 드러냈다.

8. 2020년대와 현재: 양갱의 재정의
2025년 2월 현재, 양갱은 건강과 다양성을 추구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에서 만드는 양갱이 늘며, 밀키트와 유튜브 레시피가 부활했다. 설탕 대신 메이플 시럽이나 아가베를 활용한 “건강 양갱”이 인기를 끌고, “비건 양갱”도 등장했다. 캠핑 붐으로 “수제 양갱”이 트렌드가 되었고, 지역 특산물(문경 밤, 제주 감귤)을 활용한 양갱도 주목받는다.
한류의 영향으로 양갱은 해외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2023년 미국 푸드 페스티벌에서 “Chestnut Yanggaeng”이 히트를 쳤고, 일본에서는 “K-양갱”으로 변형되어 판매된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팥 수확이 불안정해지며, 양갱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비하인드 여덟: 양갱 금지령 소동
2024년 한 지역 학교에서 “설탕 과다”를 이유로 양갱 급식이 금지되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 간식을 뺏는다”며 반발했고, 결국 금지령은 철회되었다. 이 소동은 양갱이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음식임을 보여준다.

결론
양갱의 역사는 중국 당나라의 양고기 젤리에서 시작해 일본의 사찰 음식, 조선의 궁중 디저트, 현대의 글로벌 간식으로 이어졌다. 그 비하인드에는 금지된 육식, 도둑의 나눔, 저항의 맛, 상업적 스캔들이 얽혀 있다. 2025년 오늘, 양갱은 한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달콤함 뒤에 숨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다음에 양갱을 맛볼 때, 그 한 조각 뒤에 숨은 역사를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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