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까스는 누구나 한 번쯤 먹어본 익숙한 음식이다. 바삭한 튀김옷 속에 육즙 가득한 고기, 그리고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한 소스까지.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간 경양식집에서, 학교 앞 분식집에서, 혹은 고급 일본식 돈까스 전문점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돈까스를 접해왔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먹는 돈까스가 원래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한국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실 한국 돈까스의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일본에서 전해진 요리가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하며 전 국민의 소울푸드가 되기까지, 그 과정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오늘은 한국 돈까스의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파헤쳐 보자.
1. 돈까스, 어떻게 한국에 들어왔나?
돈까스의 원조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유럽식 커틀릿을 변형해 만든 *돈카츠(豚カツ, Tonkatsu)*다. 일본에서는 1899년 도쿄 긴자의 서양식 레스토랑 *렌가테이(煉瓦亭)*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팬프라잉 방식이 아닌, 일본 특유의 딥프라이 방식으로 튀겨 바삭한 식감을 살린 것이 특징이었다.
이 일본식 돈까스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당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요릿집이나 레스토랑에서 돈까스를 팔기 시작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돈까스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대중화된 것은 1960~70년대 이후의 일이다.
2. 1970~80년대, 경양식 돈까스의 전성기
돈까스가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된 데에는 ‘경양식집’의 역할이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에는 경양식 레스토랑이 유행했다. ‘경양식(軽洋食)’이란 일본식 서양 요리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한국에서는 서양식 코스 요리를 간소화한 레스토랑을 뜻하는 말로 사용됐다.
경양식 레스토랑에서는 돈까스, 함박스테이크, 오므라이스 같은 메뉴가 인기였고, 특히 돈까스는 가장 대중적인 메뉴로 자리 잡았다. 당시 돈까스는 일본식 돈카츠보다 얇고 넓은 형태였으며, 부드러운 고기를 만들기 위해 고기를 여러 번 두드려서 펴는 방식으로 조리했다. 여기에 달콤한 케첩 베이스의 소스가 듬뿍 뿌려졌고, 함께 나오는 밥과 스프, 샐러드가 정해진 세트 메뉴였다.
경양식 돈까스는 당시로서는 꽤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가족 외식이나 졸업식,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부모님 손을 잡고 경양식집에 가서 돈까스를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던 시절이었다.
3. 1990년대, ‘왕돈까스’의 등장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돈까스는 더욱 한국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왕돈까스’의 등장이다.
왕돈까스는 이름 그대로 기존의 경양식 돈까스보다 크기가 훨씬 커진 형태였다. 보통 한 접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넓게 튀겨져 나오며, 한 끼 식사로 충분히 배부를 정도로 양이 많았다.
이런 왕돈까스는 주로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배불리 먹기 좋은 메뉴로 자리 잡았고, 특히 분식집이나 학교 앞 경양식집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왕돈까스를 다 먹으면 공짜!” 같은 이벤트를 하는 곳도 많았고, 친구들과 누가 더 빨리 먹는지 내기를 하며 즐기기도 했다.
4. 일본식 프리미엄 돈까스의 유행
2000년대 이후에는 다시 일본식 정통 돈카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먹는 등심돈까스(로스카츠)와 안심돈까스(히레카츠) 스타일의 두툼한 돈까스가 인기를 얻었다.
이전의 경양식 돈까스가 얇고 넓은 형태였다면, 일본식 돈카츠는 고기 두께가 2~3cm에 달할 정도로 두툼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바삭한 튀김옷을 유지하기 위해 빵가루의 입자를 굵게 만들어 바삭한 식감을 강조했다.
여기에 곁들이는 소스도 차이가 있다. 한국식 돈까스 소스가 달콤한 케첩 베이스라면, 일본식 돈카츠 소스는 우스터소스를 기반으로 한 짙은 감칠맛이 나는 소스다.
이러한 프리미엄 돈까스 전문점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의 돈까스 취향도 더욱 다양해졌다. 얇고 바삭한 경양식 돈까스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두툼하고 촉촉한 일본식 돈카츠를 즐기는 사람도 생겨났다.
5. 돈까스의 끝없는 변신
최근에는 돈까스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 수제 돈까스: 직접 만든 빵가루를 사용하고, 고기의 숙성도를 높여 더욱 깊은 맛을 내는 방식.
• 치즈돈까스: 고기 속에 치즈를 넣어 튀겨, 한입 베어 물면 치즈가 쭉 늘어나는 돈까스.
• 카레 돈까스: 일본식 카레와 돈까스를 함께 즐기는 스타일.
• 매운 돈까스: 한국인의 매운맛 취향을 반영해, 고추 소스를 더한 매콤한 돈까스.
6. 결론: 한국 돈까스, 독자적인 길을 걷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전해진 음식이었지만, 한국 돈까스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경양식 돈까스, 왕돈까스, 일본식 돈카츠, 그리고 수제 돈까스까지. 각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음식이다.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곳에서 돈까스를 접할 수 있다. 부모님과 함께 갔던 오래된 경양식집의 얇고 달콤한 돈까스,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나눠 먹었던 왕돈까스, 그리고 고급 일본식 돈카츠 전문점에서 맛보는 두툼한 돈까스까지.
이제 돈까스는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우리의 추억과 문화가 녹아 있는 음식이 되었다. 당신은 어떤 돈까스를 가장 좋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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