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팸 한 조각을 노릇노릇 구워 밥 위에 올려놓는 순간, 어떤 향수가 피어오른다. 고소한 기름 냄새, 짭짤한 맛, 그리고 쌀밥과 어우러지는 그 환상적인 조화. 한국인에게 스팸은 단순한 통조림 고기가 아니다. 명절 선물세트의 주인공, 부대찌개의 필수 재료, 그리고 어린 시절 도시락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이 작은 캔 속에는 미국 대공황, 세계대전, 그리고 글로벌 식문화의 파도가 담겨 있다. 스팸은 어떻게 전 세계를 사로잡았을까? 왜 한국에서는 고급 선물로 사랑받고, 서구에서는 정크푸드로 여겨질까? 오늘은 스팸의 짜릿한 역사와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파헤쳐 본다. 캔 따개를 들고, 스팸의 세계로 뛰어들 준비됐나?

1장: 스팸의 탄생, 대공황 속에서 피어난 혁신
스팸의 이야기는 1937년, 미국이 경제 대공황의 늪에 빠져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네소타주 오스틴의 작은 정육업체 호멜 푸드(Hormel Foods)는 1891년 조지 호멜(George A. Hormel)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고기를 가공해 영국으로 수출하며 꾸준히 성장했지만, 대공황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이때 조지의 아들, 제이 호멜(Jay Hormel)이 회사의 운명을 바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제이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병참장교로 복무하며 군대 식량의 비효율성을 체감했다. 뼈가 붙은 무거운 고기를 운송하느라 고생하던 그는 “뼈를 발라내고 살만 가공해 간편하게 보관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대공황으로 고기 소비가 줄어들자, 호멜은 버려지던 돼지의 어깻살과 뒷다리살을 활용해 저렴하고 오래 보관 가능한 통조림 고기를 만들기로 했다.
이 제품은 돼지고기를 갈아 소금, 설탕, 감자 전분, 아질산나트륨으로 양념한 뒤 캔에 넣어 조리했다. 천연 젤라틴이 형성되며 고기가 단단히 굳었고, 상온에서도 몇 년을 보관할 수 있었다.
스팸이라는 이름은 1936년 연말 파티에서 탄생했다. 제이 호멜은 100달러 상금을 걸고 제품 이름을 공모했고, 뉴욕의 배우 케네스 데이누(Kenneth Daigneau)가 ‘SPAM’을 제안해 당선되었다.
이 이름은 ‘양념된 햄’(Spiced Ham)과 주재료인 ‘돼지 어깻살과 햄’(Shoulder of Pork and Ham)의 약자를 결합한 것으로, 간결하면서도 기억에 남는 이름이었다. 1937년, 스팸은 정식 출시되었고, 저렴한 가격과 편리함으로 주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2장: 제2차 세계대전, 스팸의 글로벌 무대 데뷔
스팸의 진정한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과 함께 찾아왔다. 전쟁은 식량 공급의 안정성을 요구했고, 스팸은 완벽한 군용 식량으로 떠올랐다. 상온 보관이 가능하고, 조리 없이도 먹을 수 있으며,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스팸은 미군 병사들의 배낭 속 필수품이 되었다.
호멜은 전시 생산을 위해 공장을 24시간 가동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약 1억 3,300만 캔의 스팸을 생산했다. 미군 병사들에게 공급된 통조림의 90%가 호멜 제품이었고, 그 중심에 스팸이 있었다.
스팸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병사들은 남은 스팸 캔을 참호 바닥에 깔아 습기를 막거나, 캔을 잘라 공구로 사용했다. 연합군의 유럽 전선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호멜에 감사장을 보냈고,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스팸이 전쟁 중 굶주림을 막아줬다”고 밝혔다. 스팸은 연합군의 승리에 작은 하지만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전쟁은 스팸을 세계로 퍼뜨렸다. 미군이 주둔한 지역—필리핀, 괌, 하와이, 오키나와, 한국—에서는 스팸이 현지 식문화에 스며들었다. 특히 하와이에서는 스팸을 쌀과 김으로 감싼 ‘스팸 무스비’가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오키나와에서는 스팸을 넣은 ‘찬푸루’ 요리가 인기를 끌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스팸은 미군 기지가 있는 지역에서 사랑받으며, 글로벌 식품으로 도약했다.

3장: 한국과 스팸, 명절 선물로 거듭난 통조림
한국에서 스팸의 이야기는 6·25 전쟁(1950~1953)과 함께 시작된다. 전쟁 중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스팸은 한국인들에게 생소하면서도 귀한 식재료였다. 당시 고기는 귀했고, 스팸은 단백질을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고급 음식’으로 여겨졌다. 미군 부대 근처에서 시작된 부대찌개는 스팸과 소시지, 김치, 고추장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 요리로, 전후의 배고픔을 달래는 국민 음식이 되었다.
1970년대, CJ제일제당이 호멜과 기술제휴를 맺으며 한국에서 스팸 생산을 시작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염도를 조절하고, 다양한 맛(예: 마늘, 치즈)을 추가하며 스팸은 가정의 식탁으로 들어왔다.
특히 198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명절 선물 문화가 확산되면서 스팸은 고급 선물세트의 대명사가 되었다. BBC는 2014년 “한국에서 스팸은 추석 최고의 선물”이라며 한국의 독특한 스팸 사랑을 조명했다.
왜 한국에서 스팸은 이토록 사랑받았을까? 첫째, 스팸의 짭짤한 맛은 쌀밥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김치, 김, 계란프라이와 함께 먹으면 한 끼가 뚝딱 완성된다. 둘째, 명절 선물로 선호되는 이유는 실용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캔 포장과 긴 유통기한은 선물로 주고받기에 적합했고, 전후 세대에게 스팸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스팸을 많이 소비하는 국가로, 전체 판매량의 약 2%를 차지한다.

4장: 스팸의 매력, 그 맛의 비밀
스팸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결은 간편함, 다양성, 그리고 독특한 맛에 있다. 스팸의 핵심 요소를 하나씩 살펴보자.
4-1. 짭짤하고 고소한 맛
스팸은 돼지의 어깻살(95.76%)과 뒷다리살을 주재료로, 소금, 설탕, 감자 전분, 아질산나트륨으로 양념한다. 조리 과정에서 형성된 천연 젤라틴은 부드러운 식감을 더한다. 구웠을 때 나는 고소한 기름과 짭짤한 맛은 밥, 라면, 찌개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특히 한국에서는 김치나 고추장과 함께 먹으면 감칠맛이 배가된다.
4-2. 간편함과 긴 보관성
스팸은 조리 없이 먹을 수 있고, 유통기한이 제조일로부터 3년(소비기한은 10년 이상)에 달한다. 상온 보관이 가능해 캠핑, 비상식량, 군용 식품으로 제격이다. 개봉 후에는 냉장 보관 시 2~3일 내 소비하는 것이 좋지만, 밀폐용기에 담으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4-3. 다양한 요리 가능성
스팸은 구워서 밥반찬으로, 썰어 라면이나 찌개에 넣거나, 샌드위치와 샐러드 재료로 활용된다. 하와이의 스팸 무스비, 오키나와의 스팸 찬푸루, 필리핀의 스팸 프라이드라이스 등 지역마다 독특한 레시피가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스팸을 구운 기름으로 계란프라이를 만들어 먹는 것도 인기다.
4-4. 문화적 상징성
스팸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문화적 아이콘이다. 한국에서는 명절 선물로, 하와이에서는 로컬 푸드로,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패스트푸드 체인 제프의 스팸 햄버거로 사랑받는다. 2007년 스팸 70주년 기념으로 일본에서 한정판 디자인 캔이 출시되었고, 2011년 버거킹은 스팸 버거를 선보였다.

5장: 비하인드 스토리와 흥미로운 에피소드
스팸의 역사에는 재미난 비하인드 스토리가 가득하다.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
5-1. 스팸 이름의 기원 논란
스팸이라는 이름은 ‘Spiced Ham’과 ‘Shoulder of Pork and Ham’의 약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에서는 “SPAM”이 “Something Posing As Meat”(고기인 척하는 것)의 약자라는 농담이 돌았다. 이는 스팸의 저렴한 이미지를 비꼬는 것이었지만, 호멜은 이를 유머로 받아들이며 마케팅에 활용했다.
5-2. 몬티 파이튼과 스팸 메일
스팸은 1970년 영국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튼의 스케치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스케치에서 식당 메뉴에 스팸이 과도하게 들어가 “원치 않는데 잔뜩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이미지는 1980년대 인터넷 시대에 “원치 않는 전자 메시지”를 “스팸 메일”이라 부르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5-3. 한국의 스팸 선물 문화
1980년대 CJ제일제당이 스팸 선물세트를 출시했을 때, 첫해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고급 선물로 여겨지던 정어리 통조림을 제치고 스팸이 명절 선물 1위로 등극한 것은 한국인의 실용적 선물 문화를 보여준다. 한 외국 기자는 “한국에서 스팸은 샴페인 같은 존재”라고 놀라움을 표했다.
5-4. 스팸과 전쟁의 유산
6·25 전쟁 중 미군이 남긴 스팸은 한국의 검은 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일부는 스팸을 밀수출해 돈을 벌었고, 이는 전후 경제 회복의 작은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스팸이 단순한 음식을 넘어 생존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6장: 스팸의 논란과 현대적 도전
스팸은 사랑받는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높은 나트륨(한 조각에 약 570mg)과 지방 함량, 방부제(아질산나트륨)로 인해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미국에서는 스팸을 ‘정크푸드’로 여기는 시각이 강하지만, 한국과 하와이에서는 이를 반박하며 “적당히 먹으면 건강에 문제 없다”고 주장한다. 호멜은 이에 대응해 저나트륨, 저지방 버전인 ‘스팸 라이트’와 ‘스팸 레스 소디움’을 출시했다.
또 다른 논란은 스팸의 재료다. 스팸은 돼지고기 살코기 위주지만, 발골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 포함된다. 저가 런천미트가 닭고기나 전분을 섞는 것과 달리, 스팸은 돼지고기만 사용해 상대적으로 고급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부 소비자들은 “스팸은 싸구려 고기”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한다. 이에 호멜은 투명한 성분 공개와 품질 관리로 신뢰를 쌓고 있다.
현대에는 지속 가능성과 동물 복지 문제도 스팸의 도전 과제다. 호멜은 친환경 포장과 윤리적 축산을 도입하며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 또한, 비건 트렌드에 맞춰 식물 기반 대체육을 연구 중이지만, 스팸의 고유한 맛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7장: 오늘날의 스팸, 그리고 미래
2025년 현재, 스팸은 여전히 글로벌 식품으로 사랑받는다. 미국 미네소타주 오스틴에는 ‘스팸 박물관’이 있어 연간 10만 명이 방문하며 스팸의 역사를 기념한다. 한국에서는 CJ제일제당이 매년 명절마다 새로운 스팸 선물세트를 출시하며 시장을 선도한다. 하와이에서는 스팸을 주제로 한 ‘스팸 재머리’ 페스티벌이 열리고,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스팸 버거가 인기다.
스팸의 미래는 다양성과 혁신에 달렸다. 새로운 맛(예: 김치 스팸, 갈릭 스팸)과 소용량 포장으로 젊은 세대를 공략하고, 글로벌 K-푸드 열풍 속에서 부대찌개와 스팸 무스비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AI를 활용한 품질 관리와 친환경 캔 개발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스팸의 핵심—짭짤한 맛과 실용성—은 변함없이 남을 것이다.

8장: 스팸 요리와 즐기는 법
스팸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다음 레시피와 팁을 추천한다.
1 스팸 김밥
◦ 재료: 스팸, 김, 밥, 단무지, 시금치, 당근, 계란.
◦ 방법: 스팸을 얇게 썰어 구운 뒤, 김밥 재료와 함께 말아 썬다. 짭짤한 스팸이 밥과 어우러져 간편한 한 끼 완성.
2 스팸 부대찌개
◦ 재료: 스팸, 소시지, 김치, 두부, 양파, 고추장, 라면사리.
◦ 방법: 스팸과 소시지를 구워 김치와 함께 볶은 뒤, 육수와 고추장을 넣어 끓인다. 라면사리를 추가하면 얼큰한 맛이 일품.
3 스팸 무스비
◦ 재료: 스팸, 밥, 김, 간장.
◦ 방법: 스팸을 구워 간장으로 양념한 뒤, 밥을 뭉쳐 김으로 감싼다. 하와이 스타일 간식으로 간편하고 맛있다.
팁: 스팸은 얇게 썰어 약한 불에서 천천히 구우면 기름이 고루 배어나 고소하다. 구운 기름은 계란프라이용으로 활용하면 감칠맛이 더해진다.
에필로그: 캔 속에 담긴 세기의 이야기
스팸은 단순한 통조림이 아니다. 대공황의 위기를 이겨낸 혁신, 전쟁의 굶주림을 달랜 생존 식품, 그리고 한국의 명절 문화를 상징하는 선물로 거듭난 이 음식은 인류의 생존과 적응의 역사를 담고 있다.
캔을 여는 순간, 짭짤한 고소함과 함께 전쟁,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음번 스팸을 구울 때, 그 작은 조각에 담긴 세기의 드라마를 떠올려보자. 스팸은 그렇게 우리의 식탁과 마음을 채운다.